2025년 10월, 걸그룹 있지(ITZY) 가 JYP엔터테인먼트와 전원 재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단순한 ‘재계약 성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걸그룹의 재계약은 그 자체로 ‘성장 스토리’의 연장이자,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브랜드 전략이 재검증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있지(ITZY)는 데뷔 6년 차를 맞으며, 지금이야말로 그룹의 존재 이유와 시장 내 포지션을 재정립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재계약이 의미하는 것 —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상호 신뢰

JYP엔터테인먼트는 그동안 트와이스, 원더걸스, 미쓰에이 등 여성 그룹의 성공을 통해 ‘걸그룹 명가’라는 이미지를 확립해왔다. 있지(ITZY)는 그 계보를 잇는 그룹으로, 데뷔 당시부터 ‘트와이스 이후 JYP의 차세대 주력 카드’ 로 불렸다.
따라서 이번 전원 재계약은 JYP가 여전히 있지(ITZY)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메시지이자, 멤버들 또한 자신들의 커리어를 소속사와 함께 재정비할 의지를 보여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재계약은 단순히 ‘관계의 지속’을 넘어 ‘정체성의 재정의’가 수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지(ITZY)는 여전히 케이팝 시장에서 자신들의 명확한 포지션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코로나 세대의 불운 — 상승 곡선을 잃은 3년
있지(ITZY)는 2019년 데뷔 직후 “달라달라”, “ICY”로 연속 히트를 치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ITZY의 키워드는 ‘자신감’, ‘자존감’, ‘Z세대의 당당함’이었다.
그러나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은 걸그룹 시장 전체의 활동 패턴을 뒤흔들었다. 대면 공연, 팬 미팅, 해외 프로모션이 막히면서 신인 그룹이 팬덤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ITZY는 이 시기를 온라인 콘텐츠 중심으로 버텼지만, 동시기에 등장한 aespa, (G)I-DLE, NewJeans 등은 더 강한 콘셉트와 혁신적 세계관으로 팬덤을 확장시켰다.
결국 있지(ITZY)는 ‘성장세가 끊긴 그룹’이라는 인식을 피할 수 없었다. 팬데믹이 끝난 이후에도 그 여파는 남았다. 대중은 이미 새로운 세대의 걸그룹 스타일에 익숙해졌고, ITZY의 ‘걸크러시’ 콘셉트는 신선함보다 반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노래보다 콘셉트가 문제였다 — 정체성의 불연속성
있지(ITZY)의 가장 큰 문제는 ‘곡의 질’ 이전에 콘셉트의 일관성 결여에 있다. “달라달라”로 상징되는 자기애와 독립성의 서사는 데뷔 초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후 “Not Shy”, “Mafia In The Morning”, “Sneakers”, “Cake”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메시지는 산만해지고, 음악적 톤앤매너는 일관성을 잃었다.
걸크러시와 틴팝, 스트리트 감성, 귀여움, 유머러스한 댄스 등 서로 다른 세계관이 해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팬이 ‘이 그룹은 어떤 그룹인가’를 정의할 기회를 잃었다.
트와이스가 ‘러블리+발랄함’이라는 포지션을 꾸준히 다졌다면, 있지(ITZY)는 매번 새로운 색을 시도했지만 그 시도들이 ‘브랜드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있지(ITZY)의 정체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그룹’으로 인식되었다.
케이팝 걸그룹 시장의 구조적 변화

있지(ITZY)가 직면한 어려움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나 소속사의 전략 실패가 아니다. 케이팝 걸그룹 시장의 구조 자체가 2019년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첫째, 음원 중심에서 ‘콘텐츠 중심’으로 시장이 이동했다.
과거에는 좋은 노래와 퍼포먼스로 승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SNS, 릴스, 틱톡, 버추얼 팬콘텐츠 등 ‘서사형 소비’가 중심이 되었다. NewJeans가 음악보다 ‘감성의 세계관’으로 팬덤을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둘째, ‘세계관 없는 그룹’은 곧 ‘기억되지 않는 그룹’이 되었다.
있지(ITZY)의 세계관은 ‘자신감’이었지만, 그것은 단어 수준의 슬로건일 뿐, 서사적 확장성을 가지지 못했다. 반면 aespa는 메타버스 세계관, ILLIT은 감성적 미니멀리즘, LE SSERAFIM은 ‘자기 극복’의 서사로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셋째, 포지션 경쟁이 치열해진 시장에서 ‘중간층’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현재의 걸그룹 시장은 상위 브랜드(NewJeans, aespa, LE SSERAFIM)와 팬덤 중심 브랜드(IVE, BABYMONSTER, NMIXX)로 양분되어 있다. 이 사이에서 있지(ITZY)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그룹’으로 밀려난 것 이다.
있지(ITZY)의 포지션 — 자신감의 진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있지(ITZY)의 포지션은 무엇이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있지(ITZY)를 ‘걸크러시 그룹’으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강점은 ‘퍼포먼스형 팀워크와 무대 존재감’ 이다.예지, 류진, 채령, 리아, 유나 모두가 댄스라인 중심의 역동성을 지닌 멤버들이며, ‘자신감’보다 ‘실력 기반의 에너지’를 전달할 때 가장 빛난다.
있지(ITZY)는 지금이라도 ‘자신감’이라는 추상적 키워드를 ‘무대 위에서의 절대적 존재감’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즉, ‘자존감의 서사’에서 ‘무대 중심 실력파 걸그룹’으로 포지션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전략적 전환이 필요하다.
(1) 콘셉트의 축소와 일관화
ITZY가 가진 강점을 살리기 위해서는 콘셉트를 줄여야 한다. ‘자기 표현’, ‘퍼포먼스’, ‘청춘의 자신감’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 안에서 음악과 스타일을 일관되게 구축해야 한다.
(2) 글로벌 팬덤 중심 전략
ITZY는 해외 팬층이 두텁다. JYP는 트와이스 때처럼 일본 시장에 집중하기보다, 있지(ITZY)의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북미·남미 중심의 콘텐츠를 강화해야 한다. ‘무대 중심 퍼포먼스’는 언어 장벽을 초월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3) 멤버별 캐릭터 브랜딩
리더 예지의 카리스마, 류진의 중성적 매력, 채령의 무대 장악력, 유나의 비주얼은 모두 브랜드 자산이다. 이 개성을 개별적으로 부각시키면서 그룹 서사를 확장시켜야 한다.
‘트와이스의 후배’라는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ITZY의 또 다른 과제는 ‘트와이스의 후배’라는 정체성에서의 탈피다. JYP는 오랫동안 걸그룹 브랜드를 세대 계보로 구축해왔다. 원더걸스 → 미쓰에이 → 트와이스 → ITZY → NMIXX로 이어지는 구조다.
그러나 이 ‘계보식 구조’는 신선함보다 ‘비교’를 낳는다. ITZY가 트와이스와 다른 지점을 제시하지 못하면, 항상 ‘이전 세대의 그림자’ 속에 머물게 된다.
ITZY가 독립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걸크러시’라는 모호한 개념을 벗어나, ‘퍼포먼스 기반 글로벌 무대형 그룹’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즉, ‘노래 중심의 아이돌’이 아닌 ‘무대 중심의 아티스트 그룹’으로의 진화가 필요하다.
있지(ITZY) 의 2막, ‘명확한 한 줄 요약’이 필요하다
모든 성공한 케이팝 그룹은 자신을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NewJeans는 ‘감성적인 일상형 소녀’, LE SSERAFIM은 ‘자기 극복의 여전사’, IVE는 ‘자기애의 완성형’, aespa는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ITZY는? 데뷔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질문에는 명확한 답이 없다.
“자신감 있는 걸그룹”은 너무 추상적이고, “걸크러시”는 너무 오래된 개념이다.
이제 ITZY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한 줄이다. 예를 들어 “ITZY는 무대 위에서 가장 강한 팀이다.” 그 문장을 대중이 공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ITZY의 2막은 진정한 출발을 맞이할 것이다.
포지션 없는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걸그룹 ITZY는 여전히 가능성이 크다. 멤버 각각의 역량은 성숙했고, 퍼포먼스의 완성도도 여전하다. 하지만 케이팝 시장은 ‘가능성’보다 ‘정체성’을 먼저 요구한다.
있지(ITZY)가 다시 주목받기 위해서는, 자신감이라는 외피 속에 무엇을 자신 있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답이 필요하다. 그 답이 ‘무대 중심의 아티스트’, ‘퍼포먼스 기반의 글로벌 걸그룹’이라면, 그들은 충분히 다시 케이팝 중심 무대 위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포지션 없는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제 ITZY는 자신이 ‘어떤 자신감’을 대표하는 그룹인지, 그 질문에 답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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