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우리는 ‘AI 블루’를 진단했다. 이는 엔비디아의 GPU가 몰고 온 기술의 특이점 앞에서, 그리고 AI를 국가 전략으로 선포한 거대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심리적 소외감, 조바심, 나아가 존재론적 무력감의 총체다. 상품(해외) 판매와 프로그램 개발이라는 두 축을 양손에 쥐고도 ‘나 혼자 제자리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가장 정직한 초상화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단순한 기분 탓일까? 혹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나약함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AI 블루’는 지극히 합리적인 심리적 반응이며, 이는 세 가지 강력한 시대적 ‘기제(Mechanism)’가 맞물려 작동한 결과다.
오늘은 왜 유독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지, 그 심층적 원인을 ‘속도’, ‘비교’, 그리고 ‘지식의 유통기한’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해부하고자 한다. 이 감정의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극복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1. 기계의 보폭, 인간의 보폭: ‘선형적 사고’와 ‘기하급수적 속도’의 충돌

우리가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가장 표면적이고도 강력한 이유는, AI의 발전 속도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하급수적(Exponential)’ 궤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의 학습과 적응 속도는 본질적으로 ‘선형적(Linear)’이다.
인간은 걸음마를 배우고, 수년간 학교 교육을 받으며,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을 통해 전문가가 된다. 우리의 뇌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지는’ 방식의 점진적 성장에 최적화되어 있다. 하지만 AI는 그렇지 않다.
젠슨 황이 언급한 ‘황의 법칙(Huang’s Law)’은 반도체 성능이 2년마다 2배가 된다는 ‘무어의 법칙’을 아득히 뛰어넘어, AI 칩의 성능이 매년 2배 이상, 혹은 그보다 훨씬 더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AI 모델의 성능이 1년 뒤 2배, 2년 뒤 4배, 5년 뒤 32배가 되는 복리(複利)의 마법을 따른다는 의미다.
이러한 기하급수적 속도는 우리의 직관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1에서 10까지 1씩 더해가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1에서 1024까지 2씩 곱해가는 것에는 공포를 느낀다. 지금의 AI 발전이 바로 후자다.
필자가 프로그램 개발자로서 느끼는 감각은 더욱 첨예할 것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AI 코딩 보조 도구는 ‘참고할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AI 에이전트는 복잡한 요구사항을 이해하고, 스스로 코드를 생성하며, 디버깅까지 수행한다. 내가 하룻밤을 꼬박 새워 해결한 버그를, AI는 단 몇 초 만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는 마치 내가 시속 10km로 열심히 뛰고 있는데, 옆에서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시속 1000km의 제트기로 변신해 날아가는 것을 목격하는 것과 같다. 나의 ‘선형적 노력’은 ‘기하급수적 성능’ 앞에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은 이 압박을 가중시킨다. 정부 주도의 ‘AI 국가 전략’과 언론의 ‘AI 혁명’ 보도는 사회 전체를 거대한 ‘가속의 장(場)’으로 밀어 넣는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는 이 속도에 동참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된다는 집단적 강박을 느낀다. 이 거대한 속도의 격차 앞에서, 어제와 같은 속도로 묵묵히 내 일을 하고 있는 ‘나’는 상대적으로 ‘멈춰 선’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AI 블루의 첫 번째 기제, 즉 ‘인지 부조화’에서 오는 무력감이다.
2. 알고리즘이 설계한 비교 지옥: ‘SNS 속 주인공’과 ‘현실의 나’
두 번째 기제는 심리적인 것이다. 필자가 “SNS 상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고 표현했듯이, AI 블루는 ‘비교’를 통해 전염되고 증폭된다.
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타인과의 비교가 우리를 짓누른다.
과거의 ‘전문가’는 오랜 시간과 경험을 통해 공인된 존재였다. 그러나 AI 시대의 ‘주인공’은 다르다. 그들은 ‘AI로 100억을 번 20대 창업가’, ‘AI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으로 억대 연봉을 받는 비전공자’, ‘AI 그림으로 공모전에서 우승한 아티스트’ 등,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며 하룻밤 사이에 등장한 ‘뉴 엘리트’처럼 보인다.
SNS와 미디어는 이들의 성공 신화를 끊임없이 전시한다. 알고리즘은 나의 불안감을 정확히 파고들어, ‘당신도 이렇게 될 수 있다’ 혹은 ‘당신은 이미 늦었다’는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를 쉴 새 없이 피드에 밀어 넣는다.
여기서 심각한 인지적 왜곡이 발생한다. 우리는 그 ‘주인공’들이 성공하기까지 겪었을 수많은 실패와 노력, 혹은 그들이 누린 천운(Timing)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오직 화려하게 포장된 ‘결과’만을 소비하며, 그 결과와 나의 ‘현재’를 1대 1로 비교한다.
특히 필자와 같이 두 개의 전문 영역(상품판매, 프로그래밍)에서 성실하게 기반을 다져온 사람에게 이 박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나의 ‘경험’과 ‘노하우’는 오랜 시간 축적된 자산이지만, AI 시대의 성공 서사는 이 ‘시간’을 조롱하는 듯하다. ‘당신이 10년 걸려 이룬 것을, AI는 10분 만에 해낸다.’ ‘당신이 평생 쌓아온 지식이, 새로운 모델 앞에서는 무용하다.’
이 비교의 프레임 속에서 나의 성실함은 ‘비효율’로, 나의 전문성은 ‘구시대의 유물’로 낙인찍힌다.
더욱 교묘한 것은, 이 새로운 ‘주인공’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파라미터’, ‘토큰’, ‘파인튜닝’, ‘RAG’ 등. 매일같이 쏟아지는 신기술 용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그 언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분명 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현직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언어의 홍수 속에서 ‘문외한’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는 과거 ‘영어’가 그랬던 것처럼, ‘AI 활용 능력’이 새로운 시대의 ‘문해력(Literacy)’이자 신분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SNS 속 주인공들은 이 새로운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들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 놓인 이 ‘이해의 격차’가 바로 ‘나 혼자 제자리에 있다’는 소외감의 실체다.
3. 지식과 경험의 급격한 감가상각: ‘좌초자산’이 되어버린 나의 전문성

AI 블루의 가장 근본적이고 고통스러운 기제는, 바로 내가 평생 쌓아온 ‘지식’과 ‘경험’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하는 ‘감가상각(Depreciation)’의 공포다.
1부에서 언급했듯, AI는 인간의 지능과 경험을 데이터로 학습해 패턴을 찾는다. 이는 곧, 나의 지식과 경험이 AI의 ‘학습 재료’가 되거나, 혹은 AI에 의해 ‘대체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필자의 상황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관통한다.
먼저 ‘프로그램 개발자’로서의 정체성을 보자. 개발자의 핵심 역량은 논리적 사고,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특정 언어와 프레임워크에 대한 숙련도다. 하지만 AI는 이미 방대한 오픈소스 코드를 학습하여, 인간보다 더 효율적이고 오류가 적은 코드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AI가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거나 복잡한 비즈니스 로직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코드를 짜는(Coding)’ 행위 자체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내가 10년간 갈고닦은 ‘기술’이, AI에게는 단지 몇 줄의 ‘프롬프트’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은 나의 전문성을 ‘좌초자산(Stranded Asset)’으로 만들어버린다. 석유 시대에 쓸모없어진 석탄 광산처럼 말이다.
이는 ‘상품판매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해외 상품 판매는 시장 조사, 타겟 고객 분석, 마케팅 문구 작성, 바이어와의 커뮤니케이션, 물류 최적화 등 복잡한 ‘경험 기반’의 업무다.
과거 이 영역은 인간의 ‘감(Insight)’과 ‘노하우’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AI는 전 세계 시장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가장 유망한 시장을 추천하고, 현지 문화에 최적화된 마케팅 카피를 A/B 테스트용으로 수백 개씩 생성하며, 70개 언어로 바이어와 실시간 소통을 지원한다.
내가 발로 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이, AI에게는 그저 ‘학습 가능한 데이터셋’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다는 자각. 이것이 AI 블루의 핵심이다.
이 ‘지식의 유통기한’이 극도로 짧아지는 현상은 우리를 만성적인 불안 상태로 몰아넣는다. 어제 배운 기술이 오늘 쓸모없어지고, 오늘 배운 기술이 내일이면 더 뛰어난 AI 모델로 대체될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 즉 ‘학습의 방향성’을 상실한 상태가 바로 ‘나 혼자 제자리에 있다’고 느끼는 무력감의 본질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도 금방 무의미해질까 봐’ 멈춰 서 있는 것이다.
4. 현상을 직시하고, ‘나’의 좌표를 다시 설정할 때
정리하자면, 우리가 겪는 ‘AI 블루’는 개인의 나태함이나 부적응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인간의 선형적 사고를 뛰어넘는 AI의 ‘기하급수적 속도’, 성공 신화를 전시하고 불안을 증폭시키는 ‘비교의 사회적 메커니즘’, 그리고 나의 전문성을 순식간에 낡은 것으로 만드는 ‘지식의 급격한 감가상각’이라는 세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만들어낸, 지극히 당연한 시대적 고통이다.
젠슨 황이 약속한 26만 장의 GPU는 이 톱니바퀴의 속도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왜 나만 이럴까’라는 자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전문가’들이, ‘성실하게’ 살아온 수많은 이들이 같은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이 불안의 실체를 명확히 직시했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이 속도의 파도에 휩쓸려 가는 대신, 파도의 물결을 이용해 ‘나’의 보드를 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3부에서는 이 거대한 불안의 기제들에 맞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장 시작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솔루션, 즉 ‘AI 항체’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볼 것이다. AI 블루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활용’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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