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해외 여행 콘텐츠 – 공중파가 전파하는 대리만족의 그림자

1. 누구나 쉽게 떠나는 해외여행? 정말 그럴까

요즘 공중파 방송을 틀면 눈에 띄게 자주 접하는 콘텐츠가 있다. 바로 해외 여행과 현지 음식 먹방이다. 프로그램마다 주인공은 다르다. 개그맨, 배우, 아이돌, 혹은 유튜버까지. 이들이 모여 낯선 나라의 골목을 걷고, 시장에서 음식을 고르고, 웃으며 현지인과 소통하는 장면은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한 부분처럼 자연스럽다. KBS의 《배틀트립》, MBC의 《구해줘! 홈즈 in Abroad》, SBS의 《요즘 가족: 조카면 족하다》 같은 프로그램이 그 예다.

《배틀트립》은 출연자들이 직접 여행 코스를 기획하고 경쟁하는 형식을 띤다. 최근에는 일본, 태국, 유럽 소도시 여행이 많이 다뤄진다. 반면 《요즘 가족》에서는 유명 연예인이 가족 혹은 조카와 함께 떠나는 여행을 보여준다. 다양한 세대가 공감할 수 있도록 제작된 이 콘텐츠는 정서적 연결을 시도하지만, 역시 ‘누구나 쉽게 갈 수 없는’ 장소에서 ‘너무 쉽게’ 벌어지는 일이란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프로그램들을 보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가까운 지방 소도시처럼’ 해외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며, 이상한 간극을 느낀다. 나에겐 비행기 표값도, 휴가 일정도 녹록지 않지만, 방송 속 인물들은 서울 근교 나들이하듯 훌쩍 떠나고 돌아온다. 물론 그들이 연예인이라는 사실, 방송 제작비가 존재한다는 점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면, 시청자 입장에서는 어느새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각인된다. ‘나도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조급함과 좌절, 바로 거기에서 상대적 박탈감은 시작된다.


2. 포맷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유튜브 → 공중파

해외 여행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공중파 방송은 콘텐츠의 최상위 플랫폼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유튜브나 틱톡,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개인 미디어 플랫폼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커졌다. 더 이상 TV는 콘텐츠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유튜브에서 인기를 끈 포맷이 공중파로 역수입되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맥락에서 해외여행 콘텐츠는 공중파에게 매력적인 선택지다. 유튜브에서 이미 검증된 ‘여행+먹방+문화 체험’이라는 포맷은 높은 시청률을 담보할 수 있고, 제작진 입장에서도 모험 없이 안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공중파도 새로운 포맷을 창조하기보다는 유튜브의 흐름을 변주하고, 좀 더 세련된 연출과 자막, 편집으로 포장해내는 셈이다.

《지구마불 세계여행》(tvN)은 유튜브 스타일의 현장감과 캐릭터 중심의 구성을 방송에 적절히 이식한 예다. 노홍철, 주우 등 대중적 호감도가 높은 출연진들이 세계 각지에서 벌이는 미션과 일상을 따라가는 이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해외를 무대로 한 인물 중심 브이로그’와 다르지 않다.


3.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커지는 공허함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여행 콘텐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엿볼 수 있는 일탈의 쾌감, 그 자체다. 특히 유튜브에서는 시청자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들은 방송인이 아니기에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 자극적이다.

하지만 공중파는 다르다. 유튜브의 콘텐츠와는 달리, 방송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매체는 보다 대중적이고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주말 오후,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면서 틀어놓는 TV 속 여행 장면은 어느 순간 “우리도 가자”는 소망을 넘어 “왜 우린 못 가지?”라는 결핍으로 바뀐다.

한두 번은 즐거울 수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반복되면 감정은 점점 마모된다. 이쯤 되면 방송은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비교의 잣대가 되고, 그 결과 시청자는 자존감의 균열을 겪는다.

SNS에서 남의 화려한 일상을 계속 보다 보면 자신의 현실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공중파의 여행 콘텐츠도 같은 효과를 낳는다. 더욱이 SNS는 ‘내가 팔로우한 사람’의 이야기지만, 공중파는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송출된다. 그래서 피로감은 더 쉽게 찾아온다.


4.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여행의 기술

이런 감정을 혼자 느끼는 건 아닐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우리가 여행에 환상을 품는 이유를 말한다. 여행지 자체보다 그곳에서 펼쳐질 ‘나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더 큰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면, 내 안의 자아는 여전히 똑같고, 피로도는 그대로며, 감정은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관찰력, 감정의 몰입도, 관계의 질이다.

공중파가 앞다퉈 소개하는 이국적인 풍경과 식문화가 시청자에게 참신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즐거움이 너무 자주 반복되거나, 비현실적인 기대를 낳는다면 오히려 독이 된다. 진정한 여행의 즐거움은 ‘어디로’보다는 ‘어떻게’에 있다. 멀리 가야만 새로운 감각을 얻는 건 아니다. 가까운 동네, 익숙한 골목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5. 여행 콘텐츠의 진화, 방향은 ‘거리’가 아니라 ‘밀도’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해외 여행 콘텐츠는 과연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언젠가는 시청자도 지칠 것이다. 언젠가는 과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유튜브가 그랬듯, 공중파도 어느 순간 트렌드의 전환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근거리 여행 콘텐츠’다. 실제로 최근 유튜브에서는 제주도, 강릉, 안면도, 전북 군산, 충북 제천 등 ‘소도시 감성 여행’ 콘텐츠가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현지 카페, 지역 특산물, 오래된 시장 등을 찾는 영상은 전통적 먹방과 달리 **‘취향의 공유’**에 가깝다.

사실 이런 예능 프로그램은 이미 있다. EBS의 《한국기행》은 다소 느리고 소박한 리듬으로 지방의 숨은 매력을 보여준다. 또한 KBS의 《동네 한 바퀴》는 여행보다 ‘살아가는 사람들’에 집중하며, 콘텐츠의 밀도를 높인다. 해외 대신 지역, 자극 대신 정서를 선택한 이 프로그램들은 상대적 박탈감보다는 공감과 회복을 제공한다.


6. 결국 필요한 건, 삶을 바라보는 감각

여행 콘텐츠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이 주는 감정은 일시적이다. 진정한 즐거움은 TV 화면 밖의 나의 삶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TV를 끄고, 가까운 산책로를 걸어야 한다. 계절이 바뀌는 풍경, 익숙한 골목의 새 간판, 집 앞 슈퍼의 변화 – 그런 사소한 감각들이 쌓여 인생의 밀도가 된다.

공중파는 이제 단순한 ‘대리 체험’ 이상의 메시지를 고민해야 한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다르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콘텐츠의 책임은 시청률을 넘어서야 한다.

지금,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 나라보다, 오늘 이 하루의 나를 더 소중히 느끼게 하는 여행 콘텐츠. 그게 진짜 ‘엔터테인먼트’다.

slowbur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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