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가상화폐’라는 단어는 생소하거나, 투기와 탈세의 도구로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자산의 세계 한복판에 서 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이 개척한 길은 이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NFT, 탈중앙화금융(DeFi) 등 다양한 모습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바로 스테이블 코인(Stablecoin)이다. 케이뱅크가 이 스테이블 코인에 도전한다.
1. 스테이블 코인: 안정성을 품은 디지털 자산

스테이블코인은 그 자체로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이미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기축통화 기반의 가치 보존’ 개념을 디지털 자산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일반적인 암호화폐가 수요와 공급, 시장 심리에 따라 급격한 가격 변동을 보이는 것과 달리, 스테이블 코인은 미국 달러, 유로, 금, 심지어 다른 암호화폐 등 다양한 자산에 그 가치를 연동시킨다. 예컨대 1 USDT(테더)는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 방식에 따라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 법정화폐 담보형: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실제 달러나 원화 등의 법정화폐를 은행에 예치해두고 그만큼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다. 대표적으로는 테더(USDT), USD코인(USDC)이 있다. 높은 신뢰도와 안정성을 갖지만 중앙화된 기관이 자산을 관리하기 때문에 규제 위험도 상존한다.
- 암호화폐 담보형: 이더리움 같은 다른 암호화폐를 담보로 설정하고, 담보 가치보다 낮은 금액의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한다. DAI가 대표적인 사례다. 탈중앙화의 이점을 가지나, 담보 자산의 변동성에 영향을 받는다.
- 상품 담보형: 금, 은, 원유 등 실물 자산에 기반한 스테이블 코인으로, PAX Gold(PAXG) 등이 있다. 디지털 자산을 실물 가치와 연결하려는 시도다.
- 알고리즘 기반: 담보 없이 알고리즘을 통해 공급량을 조절해 가격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탈중앙화의 이상을 가장 충실히 따르지만, 시장 신뢰가 흔들리면 유지가 어려워진다.
2. 팍스프로젝트: 스테이블 코인의 가능성을 묻다

스테이블 코인의 활용 가능성을 실제로 실험하고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케이뱅크(K bank)가 참여한 ‘팍스프로젝트(PAX Project)’다. 이 프로젝트는 2025년 3월부터 5월까지 약 3개월간 진행되는 기술검증(PoC, Proof of Concept)으로, 스테이블 코인을 활용한 한-일 간 무역 송금 시스템의 실효성을 검토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의 해외송금은 수수료가 높고 송금 소요 시간이 길며, 절차도 복잡하다. 팍스프로젝트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해 일본 현지에서 환전 없이 사용 가능하도록 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특히 이 과정은 중앙은행의 개입 없이 민간 주도형으로 진행되어 디지털 자산의 실생활 적용 가능성을 실험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케이뱅크 외에도 한국디지털자산수탁(KDAC), 페어스퀘어랩, 동경국제금융센터(Tokyo International Financial Center) 등이 함께 참여하며, 기술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규제 준수 여부도 철저히 검증할 예정이다.
3. 왜 하필 지금, 그리고 왜 스테이블 코인인가?
국경 없는 자본 이동과 디지털 경제의 확장은 기존의 금융 인프라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글로벌화된 무역과 일상화된 해외 거래는 더 이상 느리고 비싼 전통 금융 방식을 감당할 수 없다. 이 틈새를 파고드는 것이 바로 스테이블 코인이다.
케이뱅크의 참여는 단순한 실험 그 이상이다. 민간 금융기관이 주도하여 국경을 넘는 디지털 자산 거래 실험에 나섰다는 것은, 향후 디지털 화폐 생태계에서 은행의 역할 변화를 시사한다. 은행은 더 이상 단순한 자금 보관소가 아닌, 글로벌 금융 기술의 중심이자 조율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실험은 향후 CBDC 도입 논의와의 접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만약 팍스프로젝트가 성공적인 결과를 낸다면, 각국의 중앙은행도 스테이블 코인과 유사한 방식의 디지털 화폐 모델을 검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4. 스테이블 코인의 미래: 규제, 신뢰, 그리고 진화
물론 스테이블 코인의 미래는 장밋빛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규제의 공백이다. 미국의 경우 테라-루나 사태 이후 스테이블 코인에 대한 규제 논의가 급물살을 탔으며, 유럽연합도 ‘MiCA’와 같은 규제안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 또한 스테이블 코인을 포함한 디지털 자산 전반에 대해 ‘자본시장법’, ‘전자금융거래법’ 등의 적용을 논의 중이다.
또한 스테이블 코인의 신뢰는 결국 담보 자산의 투명성과 운영 구조에 달려 있다. 테더(USDT)는 장기간 동안 실제 담보금 보유 여부와 관련해 논란을 빚었고, 이는 시장의 불안 요소로 작용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테이블 코인의 가능성은 현재의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를 보완할 수 있는 실질적 대안으로서 진화하고 있다. 특히 개도국이나 금융 접근성이 낮은 지역에서는 스테이블 코인이 디지털 금융 포용성을 확대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5. 새로운 시대의 화폐 실험, 그 시작

케이뱅크가 참여한 팍스프로젝트는 단순한 기술 검증을 넘어, 한국의 디지털 금융이 글로벌 무대에서 어떤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기술적 안정성, 정책적 지원, 사회적 신뢰라는 세 축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일상 속 화폐로 자리잡을 수 있다.
디지털 자산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안정적인 변화를 담보한 화폐’, 즉 스테이블 코인이 있다. 앞으로 스테이블 코인이 우리의 지갑 속에, 그리고 은행 앱 속에 어떤 모습으로 자리잡게 될지는, 오늘의 실험과 선택들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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