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관상과 스타워즈 영웅 서사

다스베이더의 얼굴

스타워즈

스타워즈에서 가장 상징적인 얼굴은 아이러니하게도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다. 다스 베이더는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호흡 소리와 검은 마스크로 오히려 더 깊은 공포와 카리스마를 자아낸다. 그의 외형은 인간의 감정을 철저히 차단한 기계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안에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이 숨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가 헬멧을 벗는 순간—흉터로 뒤덮인 창백한 얼굴이 드러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준다. 이것은 관상적으로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악의 화신처럼 보였던 인물이 사실은 누구보다 상처입고 연약한 존재였다는 역전, 이것이야말로 스타워즈의 미학이다.

얼굴이 없는 영웅과 얼굴의 복제

스타워즈 세계에서 또 다른 인상적인 설정은 바로 클론(복제인간) 병사들이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얼굴을 가졌고, 개별성이 제거된 존재들로 등장한다. 관상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무력해진다. 얼굴이 곧 정체성을 말해주는 시대에서, 동일한 얼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오히려 얼굴의 상징성을 해체한다.

이러한 설정은 관상이라는 ‘형태의 우위’를 해체하려는 일종의 서사적 실험일 수 있다. 얼굴이 같지만 성격도, 운명도, 선택도 다르다는 것을 스타워즈는 클론 트루퍼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로 보여준다. 같은 얼굴이지만 다른 삶, 이는 관상이 지닌 결정론적 함의를 부순다.

우리는 왜 얼굴에 의미를 부여하는가

사람들은 왜 누군가의 얼굴에서 신뢰, 위협, 호감, 두려움을 느낄까? 얼굴은 말보다 먼저 다가오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진화적으로 얼굴을 빠르게 인식하고 판단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그 빠른 판단은 편견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상적인 얼굴’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어떤 시대는 둥근 얼굴을 선호했고, 어떤 문화는 각진 얼굴에 권위를 부여했다. 이처럼 관상은 과학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감각의 결정체다. 이정재의 얼굴이 동양에서 ‘권위’나 ‘위엄’으로 해석되는 방식이, 서구의 시청자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유다.

얼굴을 넘어서: 진짜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여전히 얼굴을 통해 판단하고, 예측하며, 선입견을 갖는다. 하지만 스타워즈는 그런 관습을 깨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다 같은 캐릭터는 작고 낯선 외모에도 불구하고 지혜와 위엄을 상징한다. 루크 스카이워커는 평범한 외모를 가졌지만, 강력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이는 일종의 ‘반관상적’ 메시지다. 외형이 아닌 선택과 내면, 즉 인격과 관계가 영웅을 만든다는 메시지. 스타워즈는 이를 일관되게 강조해왔다. 새로운 세대의 스타워즈가 인종, 성별, 외모의 다양성을 수용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상에서 인상으로, 그리고 상징으로

관상은 얼굴의 형태와 구조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이나 운명을 예측하려는 오래된 시도다. 이마의 넓이, 눈매의 형태, 턱선의 각도 등은 고대부터 다양한 의미를 부여받아 왔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점차 ‘인상’이라는 보다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으로 이동해왔다. 인상이란,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그 얼굴이 풍기는 분위기, 말투, 태도, 심지어는 침묵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관상이 형태를 본다면, 인상은 그 형태가 자아내는 감정을 본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상이 반복되는 이야기나 경험 속에서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예컨대, 이정재라는 배우의 얼굴은 ‘관상’에서는 권모술수와 야망의 얼굴이었고, ‘오징어 게임’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분노와 생존 본능을 상징했다. 그리고 이제 스타워즈에서는 ‘낯선 동양인의 지혜로운 얼굴’이라는, 또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나의 얼굴이 세 작품을 거치며 다른 인상, 그리고 상징으로 진화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배우의 연기력이나 메이크업, 조명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가 얼굴에 투사하는 사회적 맥락과 기대가 얼마나 유동적인지를 보여준다. 동일한 눈매, 같은 입매라도 그것이 놓인 이야기의 맥락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 얼굴은 고정된 코드가 아니라, 서사의 흐름에 따라 의미가 확장되고 때로는 완전히 뒤바뀌는 ‘플랫폼’과도 같다.

스타워즈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다스 베이더의 검은 마스크는 악의 상징이었지만, 그것이 벗겨지는 순간 우리는 슬픔과 후회의 얼굴을 보게 된다. 제국의 클론 병사들은 같은 얼굴을 지녔지만, 그 안에는 각기 다른 충성, 회의, 선택의 서사가 있다. 얼굴이 더 이상 운명을 결정짓는 코드가 아니라, 운명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표면이 된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상은 더 이상 고정된 틀로서의 ‘운명의 지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만들어지고 재구성되는 상징적 기호이며, 인물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시각적 언어다. 얼굴은 더 이상 그 사람의 ‘결과’를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그 사람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에 따라 의미가 축적되고 변형된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볼 때, 단지 관상으로만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의 인상과 함께, 그 얼굴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감지하려 한다. 관상이 형태의 시대였다면, 인상은 정서의 시대이며, 상징은 해석의 시대다. 스타워즈는 이 모든 시대를 통과하며, 얼굴이라는 인간 인식의 지평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

스타워즈, 운명을 재정의하다

결국 스타워즈가 보여주는 것은 관상의 해체이자 재정의다. 얼굴에 숨겨진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 얼굴이 동일해도 전혀 다른 운명을 살아가는 존재들, 낯선 얼굴이 중심 서사로 진입하면서 겪는 충돌과 수용—all of this.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얼굴에 대해 가진 편견을 성찰하게 만든다.

스타워즈가 신화가 된 이유는 단지 대단한 스케일과 특수효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질문—“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관상을 넘어, 인상을 넘어, 결국 관계와 선택으로 귀결된다.

우리 모두는 마스크를 쓰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마스크 안에는 상처도, 욕망도, 희망도 공존한다. 그래서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라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slowbur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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